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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9일(토) (사)여성항일운동기념사업회 전남 영광군 지부(지부장 유동진)와 영광돌담시인학교(교장 김이철)가 공동으로 6.25 한국전쟁 발발 제74주년을 맞아 영광문화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제2회 인문학 역사강연과 문화예술공연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영광돌담시인학교(교장 김이철)가 기획한 문화예술공연에서 전통 우도농악을 시작으로 6.25전쟁의 컨셉에 맞춘 임세미,강보경의 민요공연과 노래 여빈, 시 낭송 김태정, 그리고 영광청음중창단(단장 이근철)의 중창 등의 수준 높은 공연으로 참석한 관객들에게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진 <제2회 인문학 역사강연>에 강연자로 초청된 군서면 남계리 출신의 현 (사)여성항일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소장인 정원식 국제정치관계학 박사로 10여 년 넘게 우리 영광군 근현대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왔던 것을 대중강연을 통해 풀어냈다. 특히 지난 2월 27일 제1회 강연회에서는 영광군 지역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그리고 3.1독립운동에 대해 강연을 했었다.
이번 두 번째 강연은 6.25 한국전쟁 발발 제75주년을 맞아 <6.25 한국전쟁 전후 영광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을 주제로 희생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중심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 주제로 군민을 대상으로 한 대중강연은 최초다.
정원식 소장은 6.25전쟁 전후로 우리 영광지역 민간인 대학살 사건의 구조적인 기원을 분단에서 찾았다. 분단의 외부적 요인으로 최초 결정적 조치는 1945년 9월 20일 소련 스탈린이 극동군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장군에 “북한지역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 수립하라”는 단독정부 수립의 비밀지령이었다. 스탈린은 이때 즘 10월 8일 중국 공산당 모택동에게도 국공내전을 개시를 부추겼다. 이후 북한에서는 이듬해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되고, 3월 경에 토지국유화가 시행되어 실질적인 북한정권 수립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분단의 내부적 요인으로 소련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해 남한 내 찬탁(친소-매국노-빨갱이)과 반탁(반공-애국투사)의 갈등 프레임이 최고조에 이르며 사실상 남북분단 고착화의 서막을 열게 된 결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좌·우익 간 진영 갈등의 기원이다.
이후 남한 내에서 1945년 9월 6일 여운형 선생의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를 선포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전적 해체와 함께 건준 지방지부를 인민위원회로 개편하면서 지방 자치행정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9월 8일 미군이 진주 후 급기야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하면서 미군 전술부대와 친일경찰 등이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해체시키는 단계로 돌입하자, 무력을 동반한 갈등과 대립의 폭력사태를 낳았다.
이때 우리 지역에서 과거 독립운동을 적극 전개했던 인사들이 해방 직후 10월 인민위원회(위원장 조희충) 조직의 핵심이 되면서 시대의 희생자로 내몰리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한마디로,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하 사회주의 진보사상을 하나의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다면, 해방 후 그들은 자의반 타의반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의주 이데오르기를 목적화하면서 비극적인 씨앗을 잉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우리 영광 지역사회의 주요 특징은 빈부격차와 신분차별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반목이 구조화되면서 부유한 자녀의 외지로 유학을 통한 진보적 선진사상(사회주의)의 유입, 인민위원회 불법화로 인한 갈등으로 지역사회 지식인들 분위기는 좌익화 되어가는 환경이 조성되어 갔다. 특히 미군정의 체제 하에 우익세력의 득세로 지역사회는 갈등의 긴장감이 높아만 갔다.
특히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1949년 1월 21일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6월 2일까지 영광 관내는 좌익빨치산과 경찰토벌대 간 총 30여 회 무력 충돌로 인해 소위 준내전 상태였다.
이렇게 지역사회 분위가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좌익빨치산과 군경토벌대 의해 민간인 학살이 대규모로 발생한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학살의 80%가 집중되었다. 이러한 학살이 집중된 배경은 첫째는 상급 통제권력의 부재로 폭력을 동반한 학살의 공적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두 번째는 우리 영광지역이 전남도당사령부와 북한 간의 해로를 통한 연결 루트였으며, 관내 산악지형은 최고의 피난처였다. 세 번째는 영광지역의 미수복 지연에 따라 적대적 감정이 증폭·가열되어 대규모 학살로 귀결되는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특히 영광읍과 백수읍, 염산면에서 최대 희생자를 낳았다. 네 번째는 사소한 이웃 간 원한관계로 인해 대규모 학살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1950년 2월 20일 국군 11사단 20연대와 경찰, 우익청년단체 등은 합동으로 불갑산 대보름작전을 시행하여 좌익빨치산을 소탕하고 드디어 영광군을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지역으로 수복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1,500여 명 넘는 민간인과 좌익세력들이 사망하였다.
특히 영광지역 내 민간인 학살사건의 특징은 적대세력(좌익빨치산과 이웃 원한관계)과 군경토벌대에 의한 학살이 8대2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현재 정부는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 보상과 배상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현재 영광지역 민간인 희생자 숫자 현황은 조사 기간 및 주체별로 다른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제1차 과거진실위와 영광군유가족회는 각각 4,402명과 5,499명 피해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조사 통계수치는 여러 상황별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조사로 자체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 민간인 학살사건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조사하는 학자-연구자 견해는 최소 2만 5천 여명에서 3만 5천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강연 중간에 정 박사가 직접 제작한 동영상 다큐 상영과 말미에 살풀이 넋전춤(춤: 양혜경)을 통해 무고하게 학살당한 원혼을 달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정원식 박사는 결론에서 ”좌익빨치산과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대학살사건 관련해 국가는 좌·우익에 관계 없이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하여 비롯된 것으로 철저한 실체적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유골발굴 통한 명예회복 그리고 유가족에 대한 법적 보상과 배상으로 국가의 책무를 다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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