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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만세시위가 광기와같았다고 지적 했다. 100년전 그날의 함성

기사입력 2019.02.01 13:45 | 조회수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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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3·1운동은 3월 10일의 광주에 이어 광주·전남 권에서 두 번째로 14일에 전개되었다. 이렇게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곧바로 3·1운 동이 전개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매우 강인한 의향 정신이 당시 군민들의 의식에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위계후·조철현 등과 같이 신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자각한 인물들의 주도 속에서 적극 전개되었 다. 특히 영광에 있어 14·15 일의 만세운동은 최초의 점화단계이자 단시간에 최고 조에 달했다.

    이틀 동안 거의 1,000여명 이상의 대규모 군민들이 대대적으로 합세하고, 지위층 이 시위대 앞뒤에서 만세운 동을 지도할 정도로 운동의전 과정은 뜨거웠다.

    일제는 만세시위가 광기와 같았다고 지적하고, 지도층 들이 ‘남들보다 한층 더 즐거운 기분으로 크게’외쳤다는 사실을 통해 영광인의 독립쟁취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광의 3·1운동은 오랜 염원이 었던 민족독립을 쟁취하고, 식민통치의 무력탄압장치인 영광경찰서에 쇄도 진입함 으로써 처음부터 강도 높은 항거이자 독립 제창의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자료참조 영광군의 역사(영광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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